봉래각 아래의 바닷가에는 등주항(登州港)의 흔적과 함께 명나라 때 척계광(戚繼光)이 해군을 훈련시켰던 수성(水城) 이 남아있다.
옛 등주항은 춘추시대 이래 역사서에도 나타나지만, 수·당대에 와서 우리나라는 물론 발해·일본 등과 교류가 활발해지자 더욱 번성하였다.
등주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연결시키는 노철산(老鐵山) 수로의 출발지이자 한반도를 오가는 북방항로(北方航路)의 종착지였다.
(장보고 시대에는 노철산수로경유항로-북방항로와 서해횡단항로 2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봉래인 등주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연이어 자리한 묘도 군도(廟島群島)를 거쳐 요동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여순의 노철산에 이른다. 곧 묘도군도의 남단에 자리한 장산도(대사도), 대·소흠도, 남 황성도(조호도)를 거쳐 노철산(마석산)에 이른 다음에, 동쪽으로 도리진(都里津, 여순만), 청니포(대련 부근), 도화포(금현 청수하구), 은화포 (장하현 화원구), 석인왕(석성도)을 지나 오골강(烏骨江, 압록강)에 이른다. 그 뒤에 남쪽으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오목도(평북 선천), 패강구(대동강 하구), 숙도를 거쳐 장구진(황해 풍천)에 이르고, 곡도(백령도), 고사도(강화도),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신라의 대외 항구였던 당은포에 이르렀다.
당나라 때 등주는 평로치청절도사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 경에 평로치청절도사였던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를 맡아 신라와 발해의 교역을 관장하였다. 때문에 이 일대의 항구들은 조선업과 해운업의 기지로 이용되었고, 신라의 사신은 물론 일본의 견당사도 이곳을 거쳐 중국에 들어왔다.
당나라 때 등주를 거쳐 장안으로 간 신라의 견당사는 30여 차례에 달하였고, 일본의 견당사는 7 차례나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엔닌이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많은 일본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 낙양이나 장안에 갔다고 전한다. 더욱이 등주의 뱃길은 남쪽으로 초주, 양주, 명주까지 이어져 있어서, 이곳을 거쳐 내륙이나 남중국으로 건너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봉래를 중심으로 한 등주 일대에는 많은 신라 사람들이 거주 하였다.
7세기 중반에 신라 사람들은 ‘신라방(新羅坊- 방형의 성안에 일종의 블럭같은))’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 살면서, 신라 상인을 접대하기 위해 ‘신라관(新羅館)’을 두었고, 신라 상인과의 거래를 위해 ‘신라소(新羅所)’라 는 무역기관도 운영할 정도였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인 이납, 이사고, 이사도 등은 55년 동안 이들을 통해 당과 신라·발해의 교역을 주관하였다.
등주성은 당 대에 신축하고 명 대에 증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