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2009. 8. 6. 11:16

장보고가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에 세운 사찰로, 일본 천태종 제 3대 좌주인 엔닌[圓仁]이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그 실체가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이었다. 

 

법화원은 창건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828년(흥덕왕 3년) 이후에 건립되었을 듯하다.

법화원은 연간 5백 섬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경제적 기반으로 운영되었는데, 장전은 아마도 가까운 척산(斥山)의 광대한 전지(田地)와 유산포·소촌 등의 땅이 일부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법화원에는 불당은 물론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강당, 승려 2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승방,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방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장경각·식당·창 고·종루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구 24명, 비구니 2명, 노파 3명 등 29명이 상주하면서 겨울철에는 『법화경』을 강설하고 여름에는 8권본 『금광명경』을 강의했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 해 1월 15일에 끝맺는 강회(講會) 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신도가 참례했다. 신라 말로 진행된 『법화경』 강경에는 200~250여 명의 남녀가 모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엔닌이 845 년 8월에 적산법화원에 왔을 때는 844년 10월부터 시작된 당나라 무종 의 사찰철폐령으로 인해 훼손된 상태였다.

 

적산법화원은 재당 신라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곳이자

장보고 선단과 나당 간 왕래 사절단의 번영과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기도도량이었다.

 

엔닌에 의하면, 당나라에 구법하고 귀국하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적산 법화원을 잊지 못해 일본 교토의 소야산에 적산의 이름으로 ‘적산선원 (赤山禪院)’을 세웠다. 1972년에 터가 발견된 뒤 1989년에 다시 지어졌다.

 

 

 

 

 

앞은 아미타상 뒤편은 관음상

 

 

 

일본인이 적산법화원을 복원하며 세운 비